201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페터 한트케의 소설 2권을 최근 읽었습니다.
페터 한트케는 오스트리아의 작가로 내용, 형식 면에서 전위적인 작품이 많으며, 관객 모독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문학동네에서 2011년 출간된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와, 2001년 출간된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를 읽었는데 두 소설 모두 200쪽 내외의 비교적 짧은 길이입니다. 전자는 1972년, 후자는 1998년 작으로 무려 25년의 간격만큼이나 형식이나 내용이 상이합니다.
개인적으로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가 조금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짧은 편지로 시작된 게임같은 이별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서사적인 흡입력을 유지하면서 통찰력 빼어난 묘사까지 중편소설 안에 꽉 담아 냅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미국의 문화 차이와 클레어와의 관계에 대한 묘사가 재밌습니다.
클레어는 실제 인물인가 싶게 입체적입니다. 아이의 특징이 먼저 충분히 묘사되고 클레어와의 관계를 드러낸 후에야 특히 아이와의 관계 묘사가 드러나는 방식 또한 흥미롭습니다. 유디트와의 이야기는 맥거핀처럼 기능하지만, 아주 명쾌하고 시원해서 긴장감은 기분 좋게 해소됩니다.
옆에 두고 아무 페이지나 펴서 읽어도 좋은 소설이면서, 동시에 휴가지에서 꼼꼼히 천천히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기도 합니다.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는 조금 더 환상적이고 내면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내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적은, 물론 몇 번 안 되지만, 언제나 내 몸이 위로 붕 뜨는 것 같은 순간이 었어요. 그리고 그때마다 매번 그 값을 톡톡히 치렀구요."
탁스함에 사는 중년의 약사가 겪게 되는 여행과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그려냅니다. 실어증, 스텝 지역, 후각, 폭력, 사랑 등의 과정을 거쳐 그는 다시 약국으로 돌아옵니다.
각각의 과정이 인과성 없이 급박한 사건으로 이루어져 과정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모험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작가의 작품활동의 메타포 일수도 있지만 소설을 통해 이야기가 아닌 분위기만으로 독자와 소통하려는 노력이 느껴졌습니다. 읽는 내내 독특한 장소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아래부터는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에서 인상적인 문장들을 모아 봤습니다.
다시 말할 수 있게 된 순간, 혹은 바로 그 직전에, 이런 생각과 더불어 그에게 사랑이 솟아났다.
"늦었어, 너무 늦었어, 너무 너무 늦었다구!" 그리고 대충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시시해! 다시 그 남자. 또다시 그 여자. 그렇고말고. 그렇다니까. 시시해! 오래 가지도 않아. 언제였더라? 언젠가 내게 잘해준 사람이 있었지. 한 사람만이 아니고. 또 그때 한 번만도 아니었지. 시시해! 그런데 나는? 그 순간에는 잘 해주었어. 그리고는 잊었지. 잘해주었고, 그리고 이젠 다시 혼자라구. 누구와도 절대로 말 안해. 시시해! 위하여 산다!
누굴 위하여 산다구? 귀한 사람들을 위해서지, 아, 수많은 고귀한 사람들을 위해. 누가 그들을 구해주지? 누가 그들에게 권리를 주나? 바로 그들을 죽음에서 깨어나게 하는 뭔가가 그러겠지! 스텝 지역의 떠돌이 행상에게 기념비를. 시시해! 내 자식을 봤을 땐,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자식 복이 있어. 내 아내도 내 아이야. 그리고 내 어머니도 내 아이고.
아버지 역시 내 사랑하는 아이! 할아버지는 유달리 작은 꼬마애라구! 시시해!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모든 게 잘된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요즘은 그래도 옛날보다는 한결 나은 거야. 어째서 승천일 축제가 크리스마스 축제보다 앞서는 걸까? '이제는 모르겠다.‘ 그게 내 친할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었지. 아니 외할머니였나? ’이제는 모르겠다.' 할머니의 그 말씀은,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가장 아름다운 문장들 가운데 하나야. 이제는 모르겠다. 자식 하나만 빼고 아들이라곤 전부 전쟁통에 잃고, 암으로 조용히 돌아가셨지.
"내 곁에 있어주오." 그녀가 대답했다.
"안 돼요-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 둘은 어쨌든 너무 늦었다는 걸 아시잖아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내게 도움을 청한 건 바로 당신이잖소?" 그녀가 대답했다.
"벌써 도와준걸요.
그녀는 자기 버스로 돌아갔고, 그는 계속해서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별하면서 두 사람은 모두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탈진 상태가 되어 서로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서로에게서 맛보았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나른함 속에 나란히 누웠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경탄 속에 깨어났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조바심으로 창마다 내다보았 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인내심으로 계속 달렸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 사랑했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에게서 자유로웠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에게 대담했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에게 감사했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를 인정했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땀을 흘렸다.
소리를 질렀다.
울었다, 피를 흘렸다, 침묵을 지키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헤어졌다.
그들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갔다, 말할 수 없음에 대하여 말할 수 없이 분노하며.
"거기 스텝 지역에서 나는 때때로 나 자신에게까지 감격 했었소. 나이 든 한 남자에 대해, 특히 나 자신에 대해 경탄 했었소.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한번 경험해보시구려. 잠시 동안이라도 자기 자신에게 감격해보지 못한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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