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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추천] 각각의 계절, 권여선

by 55도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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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펴낸 권여선 작가의 2023년 단편집 "각각의 계절"을 읽었습니다. 

 “안녕, 주정뱅이”로 권여선 작가를 처음 접했습니다. 당장이라도 알콜향이 날듯한 생생한 음주 묘사가 신선하고 재밌었습니다. 취한 뒤 온 몸이 흐물흐물해진 기분과 다음 날 아침의 찜찜한 기억. 그 기분과 기억에 대한 묘사가 내 것들과 중첩되면서 이야기는 한결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이후로 "아직 멀었다는 말" 등을 읽었습니다. 

이번 단편집 감상을 요약하자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딱 적당한 온도로 풀어내는“ 이야기 입니다. 반전이나 강렬한 소재, 구성적인 실험없이도 좋은 단편을 쓸 수 있다고 보란듯 쓰여졌습니다. 그저 오래 숨겨놓은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차례

사슴벌레식 문답
실버들 천만사 
하늘 높이 아름답게 
무구
깜빡이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기억의 왈츠



첫번째 단편인 “사슴벌레식문답”이 가장 힘이 많이 실렸다고 느꼈습니다. 인상 깊기도 하구요. 어디로든 들어와, 어떻게든 살아 하는 대답이 의젓함과 두려움 사이에서 부드럽게 흔들립니다. 마지막 단편이긴 하지만 “기억의 왈츠”를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단편집 전체를 위한 문장처럼 느꼈습니다.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 

 


“무구”는 소설집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다가왔습니다. 담담한 필치로 만둣국을 먹는 젊은 남녀와 4인가족의 시점을 뒤집는 상상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의미심장합니다.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이야기 무게에 비해 구성이 무겁게 느껴졌던 첫번째 마지막 단편보다는 "무구"가 개인적으로 좋았습니다. 


“실버들 천만사”“깜빡이”는 어머니와 딸, 자매와 자매를 다루되 시대에도 관계에도 치우치지 않은 균형감이 좋았습니다.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도 비슷한 균형감이 있으면서, 인물이 손에 잡힐듯 생생(특히 어머니)하고 유머도 넘쳐서 가장 좋았던 작품 중 하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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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인상적인 부분 발췌해보았습니다. 


사슴벌레식문답

커다란 사슴벌레가 어디로 들어오는 거예요?
정원의 질문에 주인이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득도한 듯 인자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디로든 들어와.
그리고 가버렸다. 사슴벌레를 대변하는 듯한 그 말에 나는 실로 감탄했다. 너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의젓한 말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치 가부좌라도 튼 듯 한 점잖은 자세로. 

그래, 부영아, 너무 나가지 마. 사는 거 너무 멀리 내다봐서 좋을 거 없어.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말하는 사슴벌레의 대답이 나는 상대에게 구구절절한 과정이나 절차를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의젓한 방어의 멘트인 줄 알았다. 

술을 한 잔 마시며 나는, 어떻게 치아 교정을 하나, 탄식하다가 또 한 잔을 마시며,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같이 활동하던 동료이자 친구의 남편을 감옥에 팔 년 동안 갇히게 한 진술을 하고도 자신의 입매나 치아 배열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쉰이 넘고도 치아 교정기를 몇 년이라도 달 수 있는 것이다.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은 의젓한 방어의 멘트도 아니고,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고 윽 박지르는 강요도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어디로든 들어는 왔는데 어디로 들어 왔는지 특정할 수가 없고 그래서 빠져나갈 길도 없다는 막막한 절망의 표현인지도.


실버들 천만사. 

엄마, 우리가 먹을 거 놓고 마음껏 싸우지도 못하게 된 건 뭐 땜 에 그런 걸까?
음, 반희가 생각하다 말했다. 그것도 물고기랑 같은 이유겠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세상 뭐 다 이렇게 슬픈 얘기야, 젠장. 채운이 맥주를 벌컥 마시 고 말했다. 나는 원래 생겨먹은 데서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하늘 높이 아름답게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

 


무구  

소미는 외로웠고 앞으로 자신이 더 외로워질 것을 알았다. 그래서 절대 그럴 리는 없지만 언젠가 현수가 자기를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깜빡이

 

엄마와 자매의 현실적인 이야기.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엄마와 그녀의 여동생. 그 세대의 삶과는 조금 다른 양상의 자매들. 니육신과 내육신.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원채는 다 갚기 전에 는 절대 안 없어진다고, 죽어도 안 끝나고 죽고 또 죽어서도 갚아 야 하는 빚이 원채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오익은 그게 바로 사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기피 의지와 기피 불가능성이 정비례하는, 그런 원채 같은 무서운 말과 일들이 원채처럼 쌓여가는.

 

기억의 왈츠

 

삼십 년도 넘은, 거의 사십 년이 되어가는 머나 먼 과거의 일들이다. 반복해서 돌이키다보니 처음에는 안개에 덮 인 듯 아득했던 기억이 조금씩 또렷해지는 듯했고()
그러나 과거를 반추하면 할수록 내게 가장 놀라웠던 건 그 시절의 내가 도무지 내가 아닌 듯 무섭고 가엾고 낯설게 여겨진다는 사실이었다. 오래전 기억 속의 자신은 원래 그렇게 생각되는 법인 지 모른다. 하지만 원래 그렇더라도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다. ()이런 게 놀랍지 않다면 무엇이 놀라울까.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내가 동생에게 경탄하는 동시에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대목이 이것이다. 어떻게 살아왔기에 이렇게 금세 풀고 마는가.

죽음을 가깝게 느꼈고 미래를 생각하는 일에 죄의식을 느꼈다. 내가 무엇이 될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완전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까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신경쓰지 않는 초연한 괴짜는 아니 었을 것이다. ()그런 삶의 방식이 얼마나 진심에 가까웠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진심이면 어떻고 포즈였으면 어쩔 것인가. 중요한 건 그 당시의 내가 시시각각 이상한 불안과 충동에 시달렸으며 그로 인해 실제로 고통스러워했다는 사실이다.

그 선물을 준 사람마저 이겨먹었으니까, 먹어버리듯 이겼으니까 까맣게 잊고마는 그 잔혹한 무심함은.

경서는 동봉한 편지에서 자신이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십 년 동안 써온 일기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낸다고 적었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그 편지를 쓰던 경서의 떨림을 감지할 수 있다. 

내가 여자를 잊지 못하는 건, 여자의 환영을 꿈에서도 보는 건 내 속의 무엇을 그녀가 여전히 쥐고 흔들기 때문이다. 젊은 날 숲 속 식당에서 여자를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결코 혐오 나 분노가 아니었다. 오히려 연민과 공감에 가까웠다. 꼬리털이 반 넘게 벗겨진, 여자의 존재만으로도 꼼짝 못하고 여자가 휘두르는 폭력의 자장 안에서 벌벌 떠는 강아지는 나의 과거 같았고, 머리숱이 적고 군데군데 뽑힌 듯한 헌 자국이 있는 술 취한 여자는 나의 미래 같았다. ()죽어, 버릴까•••··• 죽어, 버릴까•••··•  () 학대당한 자가 더 약한 존재에게 학대를 갚는 그 사슬을 끊으려면 단지 모음 하나만 바꾸면 된다. 비록 그것이 생사를 가르는 모음이라 해도.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 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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