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1인 시르트의 바닷가를 읽었습니다.
484페이지로 제법 묵직한 분량의 장편 소설로 프랑스 작가 쥘리앙 그라크의 1951년 작품입니다.
묵직한 분량이지만 줄거리 자체는 상당히 간단합니다.
오래되고 안정된 귀족 국가인 오르세나는 이웃나라인 파르게스탄과 오랜 세월 전쟁 중입니다. 주인공 알도는 오르세나 귀족의 명문가 자제로 오르세나에 권태를 느낍니다. 자청하여 떠난 국경지대에서 알도는 마리노 대위를 만나게 되고, 다양한 일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명목상의 전쟁에 지친 군인들이 농사꾼으로 변하는 등 여전히 권태를 느끼던 알도는 파르게스탄의 배를 봅니다. 권태가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점점 집착으로 변해갑니다.
이야기는 환상적인 묘사와 함께 진행됩니다. 시간과 공간이 얽혀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매력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는 독특한 묘사 방식이 인상적인 소설입니다.
(약스포)
결국, 국방경계선을 넘고자 하는 욕망을 참지 못하고 파르게스탄과의 휴전선을 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일은 마치 모두의 바람이었던 것처럼 일어납니다. 아니 마치 국가 오르세나의 의지를 권력자가 받아 전쟁이 일어나도록 한 듯이 묘사하는데 이 부분이 매우 신비롭고 섬세합니다.
이야기의 전개를 즐기는 분이라면 읽기 어려울 수 있지만, 충분한 여유를 갖고 상상하며 읽는다면 독특한 매력이 느껴지는 소설입니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이하는 발췌입니다.
알도. 모든 것은 두 번 죽네. 한 번은 기능에서, 다른 한 번은 기호에서. 즉 한 번은 그것이 소용 닿는 것에서, 다른 한 번은 그것이 우리를 통해 지속하는 욕망에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이룬 까닭에 이제는 할 일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이 게 내 모습이야. 한번 그걸 깨닫게 되면 이야기는 끝난 거지. 용수철이 끊어진 것 같다고나 할까. 늙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거라네, 알도. 내가 내 앞에 떨어지게 한 것, 나는 더 이상 그것을 들어 올릴 수가 없어.
자신이 이룬 것을 들어 올릴 수가 없을 때, 그것은 곧 무덤 덮개지.
설명하지.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 늙은 하인은 등도 없는 헛간에서 잠을 잤어.
그것은 습관이 되어 있었던지라 그는 어둠 속을 대낮에 길을 걷는 만큼이나 빠르게 손도 더듬지 않고 걸어 다녔다네.
그런데 어쩌겠나. 나는 결국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지. 그 가 다니는 길목에는 뚜껑문이 있었는데, 나는 그걸 열어놓았던 거야......"
노인은 힘겹게 생각하는 듯했다.
"짜증 나는 존재들인 것 같아. 세상이 언제나 있는 그대로일 거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 말이야."
살롱의 흥분에서 드러나는 유치한 점은 오르세나가 스스로에게 두려움을 불어넣고 있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만큼 권태에서 벗어날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죽음이나 영원 같은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들을 점점 더 능란하게 괄호 안에 넣어버리면서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노인처럼,
정신이 규칙에 너무 많은 것을 희생했을뿐더러 규칙이 실제로 존재 하기 때문이고, 또 규칙이 정신을 나무나 돌처럼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기이한 행위 - 우리삶에서 가장 기이한 행위 - 의 의미가 우리와 더불어 영영 잊힌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어지는 시간이 있어.
문제는 질문에, 위협적인 질문에, 지금껏 이 세상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마지막 숨이 다하기 전에는 반드시 대답해야만 했던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네."
"어떤 질문입니까?"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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