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구토>와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장 폴 사르트르의 마지막 작품인 자전적 소설 <말>을 읽었습니다.
개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9 / 308쪽
본인의 분야에서 크게 업적을 남기기도 했지만 계약 결혼 등의 파격 행보로도 잘 알려져서 철학이나 문학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도 사르트르의 이름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실존주의를 최초로 명명하고 사회에 영향을 많이 끼친, 소위 당대의 셀럽이라고 보시면 되지 않을까요.
아무튼 <말>은 자전적 소설이자 마지막 작품으로 사르트르가 오래도록 수정하며 집필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첫 문장부터 마지막까지 물흐르듯 리듬감있게 이야기가 풀려나가 누구나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며, 인상적인 문장들도 여럿 만나게 됩니다.
어린 시절의 상황이 인격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통찰이 돋보입니다. 예술이나 문학가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게 해서 작가들을 과도하게 경외하는 것을 경계하게 합니다. 2부에서는 나이듦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잘 드러납니다. 교훈을 툭 던지기보다는 '알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작가의 태도가 인상적입니다.
인간들이여, 가볍게 스쳐 가라, 힘껏 딛지 말아라
<일부 발췌>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려고 잔꾀를 쓰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둘째 자리로 만족 하자니 허영심이 허락지 않아, 아무와도 만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싶어 하도록 만들어야 한단다." 하고 그녀는 늘 말했다. 과연 처음에는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지만, 그 수가 차차 줄어들고 마침내는 만나 볼 수가 없어서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남의 우두머리가 아니고 또 그렇게 될 생각도 없다. 명령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은 똑같 은 짓이다.
할아버지는 황홀경을 만들어서 죽음의 불안과 싸워 보려 고 한 것이다. 나를 두고 이 세상의 기막힌 작품이라고 찬탄한 것은,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다 좋고, 우리의 초라한 죽음까지도 좋다고 애써 믿고자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제게 자연스러운 자리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 자리의 높이를 결정해 주는 것은 자만심도 가치도 아니다. 그것은 유년 시절이다.
나는 불쾌감을 진지함과 흔동하고 있었다.
오만과 사디즘으로, 다시 말해서 귀족성으로 달려들었다. 이 귀족성이란 따 고 보면 인색한 태도나 인종차별주의와 마찬가지여서, 자기 내면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서 분비하는 방향제에 불과하며, 결국은 자기 자신을 중독시키고 마는 것이다.
20여 년 전의 어느 날 저녁, 자코메티는 이탈리 광장을 가로지르다가 자동차에 부딪쳐 쓰러졌다. 부상을 당하고 다리가 뒤틀린 그는 기절하는 것을 의식하면서 일종의 희열을 느꼈다. "드디어 내게도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나는 그의 극단 주의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최악의 경우를 기다렸던 것이다. 다른 어떤 삶도 바라지 않을 만큼 사랑하던 그 삶이 우연의 어처구니 없는 폭력으로 인하여 뒤집히고 어쩌면 꺾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 나는 조각을 하기 위해 태어 난 것도 아니고, 살기 위해 태어난 것조차 아니었군. 나는 그 무엇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나는 이렇듯 무엇이든 맞아들이려는 그 의지에 탄복했다. 놀라운 일들을 좋아하려면 그 정도까지 철저해야만 한다. 예술 애호가들에게, 대지는 그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드러내 보여주는 그런 희귀한 벼락까지 좋아해야 한단 말이다.
열 살 때, 나는 오직 놀라움만을 사랑한다고 자처했다.
지금 소용이 될 만한 글을 2년 전에 한 장 썼던 일이 문득 생각난다. 그러면 그 원고를 찾아보지만 나타나지 않는다. 전화위복이다. 나는 자칫 나태한 생각에 빠져서 새 작품 속에 낡아 빠진 글을 끼워 넣을 뻔했으니까 말이다. 지금은 한결 더 잘 쓰게 되었으니, 새로 쓰기로 한다. 그런데 작업을 끝냈을 때, 간 곳 없던 그 옛 원고가 우연히 나타난다. 기가 막힌 일이다.
구두점 몇 개를 제외하고는 똑같은 생각이 똑같은 말로 적혀 있으니 말이다. 나는 망설이다가, 쓸모없게 된 그 묵은 원고를 휴지통에 던져 버리고 새로 쓴 것을 간직한다. 그것은 어쩐지 전의 것보다는 나아 보인다. 요컨대 내 멋대로 속 편하게 생각 하는 것이다. 철이 들었고, 게다가 늙어서 기력이 없는데도, 여전히 젊은 등산가의 도취를 맛보기 위하여 자신을 속여 넘기 려는 것이다.
후에 나는 인간이란 불가능한 존재라고 활기차게 주장했다. 하기야 나 자신도 불가능한 존재였지만, 나는 오직 그 불가능성을 밝힌다는 사명으로 해서 남들 과 다른 존재였고, 그래서 그 불가능성은 홀연 변모하여 나의 가장 심오한 가능성이 되고 내 사명의 대상이자 내 영광의 도약대가 되었다.
교양은 아무 것도, 또 그 누구도 구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당화하 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 인간은 그 속에 자기를 투사하고, 거기서 제 모습을 알아본다. 오직 이 비판적 거울만 이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할머니 같으면 이렇게 말하리라.
"인간들이여, 가볍게 스쳐 가라, 힘껏 딛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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