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롤로 잘 알려진 토즈 헤인즈 감독의 다크워터스를 감상했습니다.
캐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템포였습니다. 마치 책을 읽듯 인물들의 감정이 움직일 때마다 의도적으로 단절을 두고 관객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캐롤이 상대인 테레즈에 대한 설득이면서 동시에 관객을 향한 차분하고 느슨한 설득이라고 느꼈습니다.
다크워터스에도 감독의 특기가 잘 드러납니다. 10년을 넘게 거대 기업과 소송하고 있는 변호사의 이야기를 다이나믹한 감정을 그려내거나, 캐릭터로 풀어내거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교차편집하지 않습니다. 특유의 힘 있고 느릿한 속도로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덕분에 영화는 인체에 유해하게 판명된 물질을 고의적으로 배출한 대기업의 비도덕성과 그것을 파헤친 변호사의 이야기에서 나아가, 현대 사회에서 대기업이 갖고 있는 권력은 대체 얼마나 큰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동시에 한 인간의 양심의 힘에 대한 이야기도 보여줍니다.
1. 줄거리
세계적인 화학기업 듀폰은 세계 2차대전 중 PFOA(테프론)을 알게 됩니다. 안정성이 높은 방수 코팅을 생활용품으로 사용하고자, 해피팬이라는 프라이팬을 상용화합니다. 출시 후 1년 만에 듀폰은 공장의 노동자들이 암에 걸리고, 기형아를 출산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폐기는커녕 직원들을 대상으로 몰래 실험을 합니다. 이 사실을 몸으로 체험한 시골 마을의 농부는 대형 로펌의 잘 나가는 변호사 ‘롭 빌럿’(마크 러팔로)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롭 빌럿은 처음에는 사실이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시작하지만, 의문은 점점 커지고 사안은 중대해집니다.
2. 감상기
영화의 뛰어난 점은 앞서 말씀드렸듯 특유의 힘있고 느릿한 속도입니다. 덕분에 관객은 롭 빌럿의 감정과 함께 움직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기업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조금씩 흔들립니다. 실망과 당혹스러움을 지나,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하면 곧 해결되리라는 기대에 차게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합니다. 미국 정부, 과학자는 모두 듀폰에 매수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시간은 듀폰의 편입니다. 판결을 뒤집지는 못해도 미룰 수는 있습니다.
삶의 전성기 십여년을 이 소송에 바친 롭 빌럿의 삶은 피폐해집니다. 가족들의 희생,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보상을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 그저 병들고 지친 모습. 영웅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지만, 한 인간의 양심의 힘과 무게를 진중하게 드러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 나오는 씬은 충격적입니다. 듀폰이 폐기한 PFOA의 초기 피해자가 실제로 영화에 출연하여 롭 빌럿과 만나게 됩니다. 실제 사건, 그것도 아직 진행 중인 사건이라는 점을 명확하고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만들어졌을까요.
영화는 롭 빌럿을 외롭게 그립니다. 아마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영화는 딱 한번, 아내 ‘사라’(앤 해서웨이)의 목소리를 빌어 롭 빌럿을 응원합니다. "낯선 사람을 도운 것. 그건 실패가 아니다."
3. 아픔이 길이 되려면.
영화를 보고 최근에 읽은 책이 생각났습니다. 김승섭 작가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책입니다. 저자인 김승섭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는 '사회역학'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제당업체가 설탕과 심장병의 관계가 밝혀지자, 지방의 해악을 강조하며 소위 물타기를 한 사례 등 대기업들이 '돈' 앞에 얼마나 탐욕스럽고 무책임한 행동을 했는지를 보고, 충격 받은 기억이 납니다.
영화 <다크워터스>를 재밌게 보신 분이라면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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